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과거 제도 (문단 편집) ==== [[음서]] ==== 고려시대까지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문벌귀족]]의 초필살기 [[음서]]를 통해 바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면 그 빽으로 관리가 되는 것. 그야말로 합법적 혈연 낙하산인데, 오히려 뭐하러 힘들게 과거 봐서 관직에 오르냐는 말이 돌 정도로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 하기는 커녕, 음서 출신이 과거를 합격해 실력으로 들어온 관리들을 제치고 재상 반열에 오르는 일도 있었다. 딱히 과거 급제를 안 해도 명시적인 진급 상한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급제자 출신에 대한 명예와 예우는 분명히 있었다. 후대인 조선시대보다는 못하다곤 해도 고려시대에도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떳떳치 못하게 생각하는 인식이 있었고, 권세 있는 문벌귀족, 권문세족 가문에서도 능력만 되면 자식들이 과거로 입신하길 원했고 또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음서로 일단 관직에 진출한 후에도 과거 공부를 계속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도 꽤 있었고 과거 급제를 했다는 것은 충분히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어서인지 과거 제도 시행 이후 최고위 관직 재임자 상당수가 음서 출신인 과거 급제자였다. 단순히 가문이 좋다고 올라온 게 아니라 개중에서 실력이 확실히 있으니까 올라온 것이다. 또한 시험 감독관인 지공거 같은 일부 관직은 과거 급제자만 맡을 수 있기도 했으므로 과거 급제는 명백히 내세울만한 것이다. 거기다 과거 급제자는 오늘날의 공무원 시험의 합격자처럼 일정 품계 이상 관직부터 출발한 반면 음서는 과거급제자보다 훨씬 낮은 말단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당연히 과거 급제자가 승진이 빨랐다. 단 음서는 일반적인 과거 급제자의 급제 시 연령보다 더 빨리 받을 수 있어 음서로 말단이나마 관료 경력과 경험을 쌓고 보는 것은 확실히 이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음서를 받았다는 것은 본인이 잘하고 말고 이전에 음서도 받을 정도로 위세가 좋은 가문이라는 말이기도 하므로 나중에 과거 급제를 해서 충분히 능력을 보이면 딱히 타 급제자에 비해 꿀릴 것도 없는데다 가문의 후광까지 받을 수도 있다. 조선 초 명정승으로 유명한 황희도 원래 고려말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당시에 처음 받은 것은 품계도 없는 말단 하급직이었다. 이후 관직 생활 도중 과거에 급제하여 개경의 중앙 공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 이름을 날린 인물 중에서는 이렇게 음서로 관직을 시작했다가 이후 과거에 급제한 경우가 상당수 있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권문세족 가문 출신인 [[이인복]], [[이인임]] 형제를 보면 이 집안은 상당한 권문세족 가문이었지만 이들 형제 역시 음서가 아닌 과거로 공직에 나가기 위해 노력했고 이인복은 과거에 합격했으나 이인임은 실패하여 음서로 관직에 진출했다. 당연히 과거급제자 출신인 이인복의 출세가 초기에 훨씬 빨랐다. 이인임은 나중에 출세했지만, 초기에 그의 승진은 더뎠고 이후 공민왕기를 거치며 정치9단 이인임 특유의 처세술로 성공하게 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관료제가 보다 세련되게 발전했고, 과거 제도 또한 체계적으로 발전하면서 음서를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당장 음서 출신 관료들을 '''문음'''이라고 칭하며 명칭도 바뀌었을 뿐더러,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 관료의 아들만 음서가 가능했으며, 거기에 음서를 통해 관직을 얻으려고 해도 문음취재란 시험을 봐서 합격해야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고려와 마찬가지로 음서로 처음에 받을 수 있는 품계도 제한적이었다. 처음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품계가 이론상 과거 급제자와 마찬가지로 6품 밑이긴 한데 일반적으로는 급여조차 없는 말단직밖에 못 받았다. 과거 급제자에 비하면 승진이 상당히 어려웠던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청요직]]은 완전 봉쇄에 정3품 당상관 이상 진출하지 못한다는 진급 상한선까지 생겼으며, 더군다나 고려시대와 달리 과거로 들어온 사람보다 낮게 대우하는걸 거의 당연시 여기는 풍조가 팽배했다. 따라서 문음으로 관직에 들어오더라도 '''다시 공부해서 과거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제약이 훨씬 널널한 고려시대조차 음서로 관리가 된 사람이 과거 급제를 하는 사례가 꽤 있었고 음서 출신 고위 관료도 대부분 나중에 과거를 다시 쳐서 합격한 사람들임을 생각하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심지어 금수저 오브 금수저라 할 만한 어지간히도 권세를 누리는 사람마저 이걸 피해갈 수가 없었고 과거 급제를 해야 제대로 대접받았다. 대표적으로 그 유명한 [[한명회]]는 할아버지가 조선 국호를 받아온 한상질이며 작은 할아버지는 개국 3등공신인 명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음서로 등용되자 개성에서 경덕궁직이라는 말단관직을 전전했고 같은 관료들 사이에서도 왕따를 당했다. 한양 출신으로 개성에서 근무하는 관료들이 ''''송도계(松都契)''''라는 친목계를 만들었는데, 한명회도 한양 출신이라 가입하려고 했지만 경덕궁직도 벼슬 축에 드냐며 끼워주지 않았다. 예외적인 사례가 바로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다. '''8대 옥당'''이라 하여 8대가 내리 홍문관 관원을 지냈던 후덜덜한 문벌의 덕을 받아 음서로 관직에 올랐는데, 영조가 과거에 다시 응시하여 고관으로 나아가기를 여러번 권유했지만 '이미 은혜를 입어 음서로 출사했는데 높은 관직을 구하여 다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유로 끝까지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래도 과거 급제도 안 했는데 정3품인 광주목사까지 역임했으니 상당한 고위직까지 진출했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외로 [[영조]]시대의 화가인 겸재 [[정선(화가)|정선]]이 있는데, 이 쪽은 음직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해서 과거급제 없이 종2품까지 오르게 된다. 조선시대엔 왕의 스승이 꽤 좋은 대우를 받았고, 정선이 왕의 스승이였기에 이 상황인 경우는 일리있는 사례라 보면 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고려 시대부터 음서 출신은 외교문서 작성 업무, 대간직, 지공거 등 높은 학문이 필요한 분야에는 임명을 받을 수 없는 제한이 있었는데, 음서 출신은 과거 출신 만큼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제한이 한층 강화되어 청요직에 나가는 것이 근본적으로 막혔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청요직을 통과하지 않으면 고위직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음서의 가치가 낮아진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통과한 이들만이 당당하게 관료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면 다시 분위기가 역행하여 고관대작들의 자제들이 음서로 관직에 나가려는 경향이 서서히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에조차 고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어디까지나 과거였으며, 바로 이것이 조선 말엽에 과거제의 폐단이 대두되며 과거 시험이 막장이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다. (과거가 중시되지 않는다면 음서 카르텔이 '''과거를 무시'''하며 자기네들끼리 관직을 물려주면 되는데, 그걸 못 했다는 이야기다.) 그 [[김좌근]]조차 순조 때 [[김조순]]의 회갑 선물로 6품직에 제수되었으나 '''이후로 별다른 관직생활을 못하다가''' 헌종 때 과거 급제를 하고 나서야 폭풍승진을 거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